등산

계룡산(송년산행)

반야화 2016. 12. 28. 14:45

연말인데도 이렇게 태연할 수가 없다. 연말이 되면 어떤 특정 지을 수 없는 그 무엇에 끄달리며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보기도 한다. 그런데 올 연말은 주부의 정년을 맞은 나조차도 무관심할 수 없는 정치 사회문제들이 단조로운 일상조차 방해를 받을 정도로 블랙홀이 되어 빨아드리고 있다. 평소 낮시간에는 티브이를 켜지 않던 내가 요즘은 하루 종일 떠들어 대는 종편방송에 빠져 분노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한해의 시간대가 석양에 이르렀다. 그러나 개개인의 관심이 바위를 뚫을 수 있는 물방울이 되는 거니까 끝까지 무관심할 수는 없다.

 

바쁘게 살던 시절에는 날씨에 민감할 여유도 없이 살았는데 요즘은 매일 날씨에 큰 비중을 두게된다.날씨와 관련된 앱을 3개씩이나 깔아놓고 들여다보는 것은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 날씨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흐린 날은 아침에 이불속에서 일어나기도 싫고 손 닿는 곳에 있는 리모컨으로 온갖 기기들을 조종하며 게으름을 피우는데 어찌 보면 내가 편리한 리모컨에 조종되는 게 아닌가 싶어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처럼 아침해가 벽에다가 창살을 그리고 있으면 너무 기분이 좋아 생활의 배경음악부터 흐르게 한 뒤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굽고 옆에 있는 강아지 안아달라고 보채지만 모른 체하고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다.

 

아침이 게으른 나에게도 부지런을 떨 때가 있다. 산에 가는 날이다. 새벽하늘 쳐다보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다. 별이 보이고 그믐달이라도 걸려 있으면 룰루랄라 차에 올라 새벽바람을 가르며 떠나는 그 하루는 나의 착실한 노후대책이다. 아직까지는 체력을 저축하는 편에 속하지 쏙쏙 체력을 빼먹는 시기는 아닌 것이 다 노후대책의 진가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송년산행으로 계룡산으로 간다.

 

일기예보를 들었을 때 눈이 쌓였을 것 같아 첫눈 산행이 될 것 같은 기대를 갖고 갔는데 산 들머리는 비가 왔는지 길은 질퍽이고 나목들은 말갛게 씻겨서 갓 씻고 나온 배시시 웃는 여인같이 매끈하다. 이쁜 여인을 보면 여인보다 보는 눈이 더 즐겁듯이 상쾌한 공기를 흡입하며 오르는 발길이 아주 신이 났다. 그렇게 중턱에 올라서니 바닥에 눈이 쌓였고 밟아도 하얀 눈이  때가 묻지 않는다. 이런 날은 등산화에 껴껴이 묻은 때를 비누칠도 안 하고 다 씻겨나가는 날이어서 일부러 때 묻은 신발을 신고 나선다. 깨끗해진 발길로 한 고개 올라서니 딴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송년산행에 눈이 덮여 있고 상고대 꽃을 본다는 것은 의미가 특별하다. 상투적인 의미부여지만 다사다난했던 모든 일들을 다 덮어두고 시작한다는 것과 심신을 정화한다는 평범한 논리지만 그 외 더 거창한 의미부여란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송년산행의 날을 참 잘 받은 것 같다. 스틱이 푹푹 꽂히는 적설량은 아니자만 충분히 환호할 정도의 설경이 너무 아름답다. 남매탑까지는 길이 좋아서 산책하듯이 왔는데 삼불봉 오르는 길과 관음봉 오르는 길은 완만하지 않고 푹 솟은 봉우리여서 어찌나 가파르던지 힘들게 올랐지만 막상 높이를 보니 800미터도 안 된다.

 

설경에 도취되어 몇 개의 봉우리를 넘으면서 능선을 걷다 보니 마지막 봉우리인 연천봉에 올라서 다시 한번 지나온 눈길을 내 지나온 일 년이란 시간까지 겹쳐서 뒤돌아 보니 그렇게 아득한 거리도 아니었는데 한 발 한 발의 길이가 축지법 발길이었던 것 같은 찰나의 순간이고 그 연속이었다.

이제 하산하는 길인데 우회하지 않고 연천봉에서 넘어가는데 산속 아늑한 양지에 등운암이 있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산사를 봐 왔지만 이만큼 마음이 끌리는 절은 처음이다 대 가람도 아니고 유명한 곳도 아닌데 특별한 것은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랐다. 화려한 단청 대신에 앞면 벽에는 파릇한 수련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고 일주문도 없고 사천왕의 위엄도 없었지만 너무 단아하고 아름다워서 내 마음 한 자락을 보시로 바치고 몇 번이나 뒤돌아 보면서 마침내 한 해의 마무리를 끝내는 마음을 다 그곳에 내려놓고 하산했다. 올해의 마무리를 등운암같이 아름답게 하고 등운암같이 고요하고 곱게 시작하련다.

 

 

남매탑

 

삼불봉 오르는 철계단

 

 

 

 

 

지나온 삼불봉

 

 

 

 

 

 

 

 

관음봉 정자

 

 

 

 

 

 

 

 

동학사

 

 

 

 

 

등운암

 

 

 

신원사 중악단(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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