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추억의 크리스마스

반야화 2017. 12. 24. 16:50

1970년대, 밤을 통제받던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란 젊은이들에겐 명절이었다.

마치 전 국민이 크리스천이었던 것처럼 성탄절 전야는 본래의 의미보다는 해금이 되는 신나는 날이었다. 그 시절 나는 대구에 살았다. 전국 어디에나 그날의 밤 풍경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되는 추억의 크리스마스, 통행금지가 있던 70년대는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 시내 모든 다방과 식당들은 이미 올나잇(All night) 장소로 예약이 끝난다. 심지어 나이트클럽까지도 어느 단체에서 예약할 정도로 그날의 24시간은 길게 길게 늘여서 마음껏 취해도 용서받는 만우절의 거짓말 같은 것이었다. 그때에 아마도 고래사냥의 가사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의 노래가 탄생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유는 속박당하고 민주화운동의 여파 때문에 여럿이 모이는 것조차도 허용이  되지 않던 암울한 시절의 자유야말로 움츠렸던 심신의 억압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새파란 청춘의 날갯짓이 아니었을까,

 

주머니 사정이 좋거나 발 빠른 무리들은 유흥가를 잡지만 우리같이 얌전한 처녀들은 자취하는 친구의 집이 최적의 장소였다. 요즘처럼 아파트가 많던 시절도 아니어서 밤새 떠들어도 누가 뭐라고 관섭하지 않던 질곡 속의 자유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24시간이 다 내 것인 시대의 자유는 자유의 맛이 얼마나 신선하고 달콤한 것인 줄 모른다. 질곡 속의 자유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통제받지 않는 자유에는 방종이 따르기도 하지만 그 시절의 크리스마스이브는 절대로 잠을 자면 안 되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이어서 친구들과 밤을 새우는 놀이가 없는 외톨이들은 쇼핑을 하거나 거리를 이유 없이 헤매면서 대구의 유명한 동성로 거리는 인파들의 까만 머리만 꿈틀댈 뿐 땅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행사가 없어도 땅이 보이지 않던 그 무리 속에라도 들어가 휩쓸리는 것이 젊음의 표상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해의 크리스마스이브는 나 혼자 밤을 새운 일이 있었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접고 남자 친구와 만나기로 하고 집에서 기다리면 그가 일차를 끝내고 데리러 온다고 해서 자정이 넘도록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평소 같으면 사이렌 소리가 거리를 잠들게 할 때쯤 나타나서 내 방 뒤 창문을 동전으로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면서 똑똑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나는 나가지 않았더니 한참 후에 다시 대문 쪽으로 와서 신호를 보내서 식구들이 알까 봐 고이 나가서 언쟁을 벌였다. 돌아가라며 화를 냈고 이렇게 늦게 오면 나갈 줄 알았느냐고 싸웠던 것 같다. 술냄새를 풍기며 밤늦게 나타났던 그에게 너무 화가 나서 불행한 올나잇을 했는데 후에 생각하면 그의 의도가 불순한 게 아니었을까 싶었다. 어쨌든 이브는 잠들지 못하는 명절이었다. 그 시절이 그래도 그립다.

 

그렇게 자유를 갈망하던 시대를 살다가 경주로 시집을 갔다. 그런데 이게 왠일이냐! 경주에는 관광지여서 통행금지가 아예 없었다. 경주 사람들은 너무 자유로워서 나에겐 익숙지 않은 시간관념의 신혼시절이 너무 힘들었다. 좁은 고향땅의 남편은 하루도 퇴근해서 바로 들어오는 날이 없었고 대문 밖만 나가면 선후배와 친구들을 만나니 본의 아니게라도 보통 3차까지는 거쳐야 집에 들어온다. 난 그게 너무 싫어서 서울로 이사를 가자고 졸랐다. 매일 밤늦게 들어와서"까꿍"하면서 문을 열어달라고 애교를 부렸지만 화가 나서 문을 안 열어주다가 한참 후에 살며시 나가 보면 대문 손잡이에 들꽃이 꽂혀 있고 사람은 없었다. 미운데도 미워하지 못하던 철없는 신혼일기가 지금 생각하면 내가 글쓰기를 즐기는 계기가 되었다. 남편을 기다리던 무료한 시간에 아이를 키우면서 늘 일기를 쓰고 글씨 기를 했었다.

 

통행금지를 원했던 마음은 시간이 흘러도 적응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자유로움에 길들여진 남편을 나만의 도식에 가두어 순치의 머리를 써봐도 소용이 없어 내가 변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가끔은 모아모아 둔 화 보따리를 끌어안고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반월성으로 나가자고 해서 쌓아 둔 온갖 잔소리로 싸움을 걸어도 다 잘못했다는 말만 하니 싸움은 언제나 진검승부가 아닌 용두사미로 끝났거나 아니면 내가 이겼다. 몇십 년이 흐르고 생각하니 재미있는 추억이고 지금은 캐럴이라도 들어야 크리스마스라는 걸 안다. 아, 이 무디어진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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