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조선 시대 종이 재활용 법

반야화 2007. 7. 25. 18:09

 

최종덕 저,  창덕궁을 읽고 나서

흔히 역사는 승리 한자의 기록처럼 말하는 이도 있지만 꼭 그렇지마는 아닌 것 같았다. 조선시대 실록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허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관이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기록하여 실록을 남기는데, 승정원 주서들이 임금 옆에서 기록한 일기를 당후일 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또한 승정원일기를 편찬하는 자료로 쓰이기도 한다. 당 후일 기나 승정원일기의 자료가 되는 것을 사초라고 하고 이 사초는 기록의 객관성을 확보하고 사관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비록 임금이라도 볼 수 없도록 했다고 한다.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임시 기관인 실록청을 설치하여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에서 시행한 일을 기록한 시정기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실록 편찬에 착수한다고 한다. 그러나 승정원 주서가 작성한 당 후일 기는 정사에 참고하기 위해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록을 편찬할 때는 사초와 시정 기를 정리하여 초초를 작성하고 이를 수정하여 중초를 작성한 다음 최종본인 정초를 완성한다고 한다. 사관이 작성하는 사초는 크게 입시 사초와 가장 사초로 구분하는데 입시 사초는 임금이 있는 현장에서 사관이 입시하여 기록한 사초이고 가장 사초는 사관이 퇴걸 후 자신의 집에서 재정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도 일이 많으면 집에까지 일거리를 가져가서 했던 것 같다.

 

가장 사초는 정사의 현장에서 사관 자신이 느낀 의견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덧붙여 기록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때에 사관의 주관이 조금은 가미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가끔씩 중요하고 꼭 지켜야 할 비밀스러운 약속을 할 때에 쓰는 말 중에, 비밀을 무덤까 가져갈 것을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지켜지기가 어려우나 조선시대 때 정태제의 무덤에서 사초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야말로 정태제는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간 셈이라고 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사초는 정태제가 집에서 정리하고 난 가장 사초 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실록이 완성되고 나면 사초를 물로 씻는데 이것을 세초라고 한다. 세초는 실록의 내용이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고 아울러 사초, 중초, 정초 가 될 때까지의 방대한 종이를 재활용하기 위함이라 한다.

 

종이 재활용을 위한 세초의 작업은 당시 조지서와 가까운 세검정에서 이루어졌고 차일암이라고 하는 너럭바위에서 종이를 말렸다고 하는데 상상을 하면 엄청난 분량의 종이를 말리는 과정이 아마도 산에 눈이 덮인 풍경과도 같았을 것 같다. 세초를 하면 먹물이 빠지고 종이는 닥종이 원료처럼 다 풀어질 것 같다. 그 옛날에도 이렇게 종이를 재활용하는 방법을 알고 나니 지금은 종이가 너무 흔해서일까 낭비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세초는 매우 중요한 행사로서 실록 편찬에 수고한 관리들을 위로하기 위한 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숙종 때 예문관 검열로 사관을 지낸 조문명은 세초 연을 시로 남겼다.

 

작은 붓이 어떻게 하늘을 다 그리랴.

아! 성대한 덕이 뭇 왕보다 앞서 섰네

10년 만에 비로소 편찬 일을 마치고

한가한 날 처음으로 세초 연을 열었네

날이 저문 뒤에 밥 지으니 미식에 해당하고

비 온 끝의 산과 물은 현악 소리보다 낫네

옛날에 붓 잡던 일 이제 꿈만 같은데

완성된 글 열람하며 다시 눈물짓노라.

 

요즘처럼 기계로 찍어내는 출판이야 쉽게 할 수 있지만 일일이 붓으로 여러 과정을 거쳐한 권의 실록이 탄생하는 걸 알고 감탄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북한산 자락에 너럭바위를 찾아보고 싶은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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