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9.10일 역 올레
지난달 그 혹서기에 올레 5개를 끝내고 난 뒤, 어느새 9월 중순이 되고 그동안에 뜨겁던 제주 땅은 식어서 걷게에 아주 좋은 맑은 가을 하늘이 되어 있다. 가을이 온다는 거, 그건 문득 생각나는 그 무엇이 있어서 찾아 떠나고 싶어지는 그런 계절이다. 생각만 해도 설레는 가을여행 추억의 설렘이 있는 그런 가을에 떠나는 제주행, 비행기에서 한라산 정수리에 감도는 구름을 보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정교하게 짜 놓은 들판의 선들이 아름다운 그림 속으로 사뿐히 내려앉는 발끝에 느껴지는 행복의 조각들을 밟는 맑고 밝은 마음이다.
첫날, 14코스를 걷기로 한다. 14코스는 끝 지점에 한림항이 있고 거기서 비양도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비양도를 보고 시작할 수 있는 역 올레를 하기로 했다. 전 날에 버스와 배를 타야 하는 시간을 맞추고 일정의 모든 걸 체크해서 아침 6시에 출발한다. 이른 아침에 맑은 하늘을 이고 출발하는 발걸음은 입사 첫날 들뜬 기분으로 출근이라도 하는 그런 기분이 된다. 비양도를 다 둘러보는 데는 3시간도 안 걸리지만 배편이 그렇게 짜여 있어서 우리는 9시에 들어가서 12시 15분에 한림항에 도착해 바로 역으로 올레를 시작했다. 한림 하면 먼저 협재 해수욕장이 떠오르는 곳이다.. 유명한 건 알았지만 듣던 데로 협재의 철 지난 바다는 아직도 옷을 입은 채로 발만 담그는 인파들이 참 많았다. 늦여름이 지속되고 있어서 여름의 여운을 느끼려는 인파들 틈에서 사진도 찍고 깨끗한 해변과 은모래 푸르른 바다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다음 지점 몇 개를 더 지나 보고 싶었던 선인장 마을에 도착했다. 제주에서 선인장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한림의 자생지는 그야말로 선인장 천지였고 약용작물로 가꾸는 농장까지 있어서 볼만한 곳이다. 지금은 묵은 줄기에 세싹이 돋아 손바닥만 하지만 노란 꽃이나 보라색 열매는 없고 온통 녹색이지만 초여름의 노란 꽃이 밭 한가득 피었을 때와 보라색 열매가 한 밭 가득일 때를 연상하면서 걸었다.
14코스에서 보고 싶었던 걸 보고, 이제는 무명천을 따라 길게 이어진 굴렁진 숲길, 오시록헌 농로, 큰 소낭 숲길 등 숲길이 계속 이어진다.무명천의 이름이 혹시 무명천 할머니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 흔적을 못 봐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4.3 사건으로 총에 맞아 턱을 잃고 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가리고 고통의 세월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는 집이 월령에 있다 하니 혹시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짝 마른 무명천을 옆에 끼고 걷는 동안에 물 대신에 덩굴들이 하천을 건너 다니면서 얽히고설켜져 있다. 그리고 좁다란 산책로에는 말들이 풀을 뜯는 길이었는지 깊게 들어갈 수 없는 숲길이 어서 온통 말똥이 깔려 있었지만 향기로운 칡 향이 진해서 걷는 동안에 말똥 냄새는 풀향기 같고 아카시아꽃 향보다 더 맛있는 칡 향에 푹 젖어보는 향긋한 길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 길이 내 발길을 이끌어 갈지 궁금한 끝 지점에 다시 와야 하는 곳에서 하루해가 저문다.
선인장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