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풍을 동반한 비가 흠뻑 내리 고난 뒤 맑게 갠 날이다. 이제 막 돋아나는 잎들의 순이 강풍 때문에 똑똑 끊어져 있고 진달래도 다 지고 없지만 푸른색이 짙어지니 꽃 진 설움의 위로가 되어주고 있다. 비 온 후에 촉촉한 흙과 나무들이 풋풋한 향을 뿌리고 적당한 바람결엔 솔향마저 진동하니 들숨이 가빠진다. 이렇게 좋은 날은 날씨만으로도 행복하다. 혼자 조용히 산책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풍요로움이라고 하면 가을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내 생각엔 봄이 더 풍요로운 계절이라고 말하고 싶다. 농경사회에선 가을의 수확이 그걸 증명해 주지만 거두어 들일 것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풍요롭기는커녕 엄습해 오는 추위에 맞서야 하는 걱정이 더 컸을게다. 그러나 요즘 같은 산업사회에선 가을의 수확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계절 구분 없이 필요를 채워주니 굳이 가을이 아니라도 수요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니까 말이다.
봄은 어떠냐? 겨우내 추위에 떨던 가난한 이웃도 다 따뜻하게 지낼 수 있고 누구나 부지런을 떨면 봄 속으로 뛰어 들어가 꽃도 잎도 모두 내 것으로 만들고 마음은 온통 아름다운 포만감으로 채울 수도 있고 지천에 돋아난 쑥과 봄나물로 몸까지 포만감을 느낄 수 있으니 가난한 자도 부자도 모두가 풍요를 느낄 수 있는 계절이라고 생각한다. 봄에 한껏 심신에 풍요를 채우고 나면 일 년을 배부르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 있으면 보드라운 새순들을 벌레들까지 풍요로움에 젖을테고 나무들은 그 찢기는 아픔도 감수하면서 제살을 조금 나누어 주겠지. 이렇게 생명 있는 만물이 풍요를 느끼는 건 봄이라는 생각으로 동산을 한 바뀌 돌고 나면 집 가까이 숲이 있다는 것 또한 내겐 더할 수 없는 풍요를 느끼게 해 준다. 이제 곧 연달래가 온 동산에 피어날 것이다. 기다려지는 게 있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산다는 게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