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note

수난과 평화

반야화 2010. 9. 7. 17:02

높고 파아란 하늘, 가을 자리다. 여름 내내 지독한 산모기의 공격 때문에 공원 산책을 못하게 되었는데 며칠 전에 태풍을 만난 산이 걱정스러워 올라 가는데 숲에 들어서자마자 모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데 까짓것 후유증만 남기지 않는다면 피를 나누어 줄 수도 있지만 한 번 물리고 나면 오랫동안 가렵고 붓고 고생을 하기 때문에 산 모기는 피해야 한다. 그렇지만 오늘은 끝까지 올라가서 공원을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서 바라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키 큰 나무들이 꺾이고 뽑히고 넘어지고 해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가 너무 심해서 눈물이 났다. 문을 닫고 걱정 없이 잠든 사이에 아무런 느낌도 없이 잘 잤는데 숲은 태풍을 만나 저토록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사투를 벌이고 있었구나 싶었다. 반면에 태풍이 지나고 마을을 둘러봤을 때는 뉴스에서 본 피해 같은 건 우리 마을엔 없구나 생각했다.

 

동네를 다 둘러봐도 키 큰 소나무가 많은데  금방 심은 것이 미처 뿌리를 내리지 못해 한 그루가 넘어졌지 다른 나무들은 온전했고 심지어 잔가지들도 부러지지 않았고 파란 낙엽도 거의 없었다. 그 모든 평화가 있게 된 건 밤새도록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진관 공원이 태풍이 마을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사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너무 고맙고 미안하고 앞으로 많이 사랑하고 아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토록 큰 재해를 주던 하늘이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맑고 푸른 얼굴로 여름내 잦은  폭우에 가슴 밑바닥까지 울음으로 젖어있던 민초들의 물기를 다 말려주듯 인자한 얼굴이다.  폭염이 바닷물을 퍼 올리고 퍼 올린 양만큼 비가 되어 세상을 할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바다의 순환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으리오. 생명의 근원이고 생활의 기본인 물도 두 얼굴이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단 서너 시간의  소용돌이를 참지 못해 세상을 초토화시켜 버리니 누가 자연의 힘 앞에 세력을 과시하며 잘났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오늘 같이 파랗고 높은 도화지엔 그릴 것이라곤 뭉게구름과 잠자리의 비행뿐 아무것도 그려 넣을 것이 없다. 켜켜이 덮여 있던  검은 구름을 다 걷어내고 가을은 하늘에서부터 나리는구나. 그리곤 뭉게구름 저 너머에서 가을의 손은 초록에 덧칠할 물감을 풀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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