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과 혹서를 견디다 보면 다시는 다른 계절이 오지 않을 것 같음을 느낀다. 겨울 뒤에 봄이, 여름 뒤에 가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투정을 부린다. 계절의 악조건을 견디어 낼 때에는 그것마저 뭔가 쓸모 있음을 찾는다면 나쁜 계절은 없다.
두 번이나 미루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최적의 날을 맞았는데 내 몸 컨디션이 엉망이다. 전 날 밤 잠을 놓쳐버리고 겨우 한 시간 정도 잔 것 같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도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안 좋았지만 내가 만든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이 더 안 될 일이어서 먼저 도착할 친구에게 약을 부탁하고 기어이 그 장소, 그 길을 올랐다. 몸이 안 좋아도 산속에 더 좋은 처방이 있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너무 좋은 풍경을 보면 혼자 독락 하기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은 다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기억 속으로 두 친구를 기어이 끌어들인 초가을 행보는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도봉산 오봉코스를 송추계곡에서 시작했는데 동네가 많이 바뀌어 있고 산길은 어느새 가을 연회장의 길을 양 옆으로 꽃 같은 단풍길을 활짝 열어두었다. 계곡에는 폭포의 연명과도 같은 가느다란 물줄기를 이어가고 있지만 바닥의 가난한 수량은 옥수를 담아 주위 풍경의 반영을 담아내고 있었다.
상념의 계절인 가을 낙엽을 밟고 올라가는 길의 나뭇잎들은 무성했던 청춘을 여의고 멍들고 찢어진 채로 초라하다. 푸르렀던 숲은 청춘을 마음껏 향유했을까. 그래서 미련 없이 낙엽귀근의 섭리로 돌아가는 길이 슬프지 않은 걸까, 아니면 다시 온다는 것을 알아서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걸까. 한 번뿐인 청춘을 보내버린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자연 속에서 뭔가 교훈적인 인생을 읽어내야 하는데 몰라서 어리석고 아프다.
너무 늦게 자연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에 빠져 있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말한다
"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십 년 전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한다. 늦은 시작에서 드러난 후회였을 것이다. 나에게 남아있는 행복할 수 있는 날들이 자꾸만 줄어드는 아쉬움이 왜 없겠는가. 그래서 내가 말했다. 앞을 내다보면 십 년 후보다는 지금 젊은 것이라고.
셔터 한 번의 짧은 순간에 세상을 다 담을 수 있는 사진 찍기가 너무 재미있다. 이런 재미로 자연 속에 있으면 오직 현재의 시간에 심취할 뿐 의식을 어지럽히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없다.
떨구어 낸 빈가지의 여백만으로도 너무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해 내는 가을은 훌륭한 연출가다.
오봉으로 오르는 송추계곡 입구
가난한 송추폭포
오봉 뒤쪽에서는 멀리에 신선대와 자운봉의 반대편이 보인다.
백운대 일대는 감청색의 원경을 펼쳐놓고 장엄함으로 친구를 향해 더 높이 올라라고 유혹한다.
지나올 때는 보지 못한 저 웅장함 밑으로 올라와 멀리에서 바라보는 가을풍경이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오봉 풍경을 바라보던 친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친구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최고점에서 바라보는 일망무제의 유장한 파노라마를 보면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마음속으로 고도를 더 높였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아도 오랫동안 잔상에 남아 미소 짓는 밤이 되었을지도......
여성봉 뒤쪽에서 바라보는 오봉, 숨어 있던 하나까지 다 보이는 아슬한 저 모양은 언제부터 있었고, 언제까지 있을까. 신기하고도 절묘하다.
사패산도 잘 보이고.
여성봉
하늘을 담고 있는 입술
행복한 가을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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