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덕유산 설경

반야화 2017. 1. 25. 15:06

코스:안성 매표소-동엽령-백암봉-중봉-향적봉-백련사-무주구천동계곡-삼공 매표소 주차장.

 

내 맘 속의 샹그릴라 겨울 덕유산, 대자연의 무위가 만들어낸 실경산수에 잠자던 서정이 땀구멍마다 다 들고일어나 마음 밖에서 뛰어논다. 기대는 행복을 불러오고 그 기대가 충족되면 행복이 사라진다고 하지만 올겨울 행복이 여기서 사라진다고 해도 여운은 오래 남을 거야.

 

처음으로 덕유산 설경에 빠져 한동안 그 여운으로 보냈던 기억을 안고 다시 그곳으로 간다. 노루꼬리만큼 길어진 밝음이 어둠을 밀어내지 못하는 시간에 첫새벽을 가르며 달려가는 마음속엔 하얀 눈밭으로 채우고 백지로 간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모른 체, 채색이 필요 없는 그림을 연상하면서 도착한 무주 안성, 조용한 안성 계곡을 출발해서 동엽령으로 가는 길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나갔는지를 말해주는 잘 다져진 때 묻은 눈길을 차분히 올라간다. 조금 지나니 눈길은 때 묻지 않은 하얀 길로  다져져 있고 동엽령 오르는 계단을 땀 흘리면서 오르는데 제를 넘어온 바람이 칼칼한 청양고추 같으면서도 속으로 들어가니 뽀글뽀글 넘어가는 탄산수 같은 청량감이 너무 좋다.

 

흐르지 않는 바다를 이고 설국을 오르면 바다는 어느새 바탕화면이 되어가고 파아란 바탕에 하얀 나무가  먼저 그려지더니 동엽령 올라섰을 때 오른쪽 산봉우리엔 검은 몸통은 없고 하얀 눈이 꽃이 되고 잎이 되어 온 산이 하얗게만 보이는 내가 그리려던 첫 장면이 묘사된다. 잠시 쉼터에서 둘러보는 설경은 밑으로 밑으로 이어졌고 다시 오른쪽 능선길을 가는 데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단의 경지에 빠지게 한다. 그냥 눈에 보이는 데로라면 채색이 없는 모란, 장미, 목화 솜사탕, 관을 벗어놓고 사라진 사슴뿔, 눈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까지 수많은 하얀 객체들이 피어 있다.

 

"눈먼 사람이 이 길을 지나면 눈을 뜰 것이요

귀 먼 사람이 이 길을 가면 귀가 열릴 것이다."

이렇듯 초현실이 실현될 것 같은 절대의 아름다움에 압도되는 눈길을 걷게 된다. 선택되지 못하고 날카로운 가위질에 잘려나갈지도 모르는 장면들을 수없이 카메라에 담으면서 백암봉에 도착한다. 백암봉 아늑한 곳에서 점심을 먹는데 편히 앉지 못하고 선체로 밥을 먹 지민 입으로 먹는 반찬보다 눈으로 먹는 반찬이 더 맛있다. 차 한잔의 여유도 없이 다시 중봉을 향해간다. 까마득히 높아 보이지만 하얀 실경산수화 같은 눈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작은 꽃잎같이 이쁘게 보인다. 바라만 보는 그림이 아닌 그 화폭에 내가 그려져 아무리 뛰어놀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꽃잎이다. 그저 오늘 난 꽃잎이 되어 덕유산 바람 속에 날리며 말과 표현이 군더더기가 되는 그림으로만 말하는 것이 더 진솔한 명장면 속에 있다.

 

중봉에서 바라보는 희미한 지리산 천왕봉의 풍경은 마치 구름 갓을 쓴 것 같은 위엄으로 다른 봉우리를 감싸고 푸른빛을 띄우며 아스라이 보이는 이름 모를 봉우리의 장단고저의 곡선은 한국의 미를 펼쳐놓은 듯하다. 한참 동안 중봉에서 사방을 바라보고 떠나는 향적봉으로 가는 길은 힘들게 올라온 계단길을 쉬어가는 듯 편안한 길을 간다. 그런데 이 길은 더 특별하다. 덕유산 설경의 점입가경이 펼쳐진다. 이제까지 봐 온 풍경에다가 주목을 심어놓았으니, 천생 천사의 주목을 보니`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닌다`는 말과 같이 주목은 천년을 늙어도 멋을 부릴 줄 아는 품격을 지니고 바람이 키우는 방향으로 서 있는 풍경이 덕유산 설경의 화룡점정이 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향적봉에서 보이는 높은 봉우리의 산엔 선명한 산이랑 들이 골골이 흘러내린 모습이 마치 인생의 역경이 저처럼 굴곡져 왔지만 인생을  잘 살아낸 사람들한테는 굴곡진 삶이 끝내는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는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 가득히 안고 하산하는 길이다. 향적봉에서 백련사로 내려가는데 눈이 쌓여서 미끄럼을 타면서 가니 가속도가 붙어서 느리게 걸을 수가 없었다. 가야 하는 시간이 빠듯하니 마침 잘 됐다 싶어 마구 미끄러져가는 길 막바지에는 겨우살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겨울에 잠을 자면서 여름내 축적된 양식을 먹고살아야 하는 나무의 우듬지에 기생하면서 꽃을 피우는 양심 없는 겨우살이에 이타행으로 살고 있는 나무야말로 보살행을 실천하라는 백련사의 가르침을 들은 것 같다. 백련사 뒤편 산기숡에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모신 부처님 사리탑이 하얀 눈을 봉긋이이고 천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아래 백련사는 눈 속에 고립되어 고요만이 깃들어 인적도 없이 동안거의 공부로 충만된 구도의 길로 들어서서 아직도 진행중인다. 성불, 성불 성불하소서. 백련사를 내려와 지루한 무주구천동 계곡길 5.8킬로를 몽둥이 하나 들고 무엇을 잡으로 가는 것처럼 스틱을 접어 쥐고 뛰듯이 가는 빠른 걸음이 힘들지만 "좋았어, 너무 좋다" 그 한마디에 함축한다.

 

떡갈나무와 소나무의 우정

하얀 모란

 

만발한 목화송이

 

 

 

 

대비

 

 

 

 

 

 

 

 

중봉으로 가는 길

 

 

두 번 피는 꽃

 

지나온 백암봉

 

중봉에서 바라본 덕우산의 풍경

 

 

 

광열 한 태양빛

주목의 뼛속에도 눈이 들어차고...

 

 

 

 

 

 

눈 속에 고립된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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