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설천봉-향적봉-백암봉-동엽령-안성지구
한라산이 진달래로 뒤덮였을 때 진달래만이 꽃이다.라고 했다. 설악산 공룡능선에 섰을 때 단풍이 꽃 이상이다.라고 했다. 오늘 덕유산 선계에 도달했을 때 아! 눈꽃이야말로 꽃의 절정이다.라고 난 또 변했다. 아! 이 지조 없는 자연을 향한 마음을 어쩌란 말이냐!
지난가을 선운사에서 가을을 보내고 돌아서 온 뒤 한 달가량 공백 기간을 보내고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산행을 했는데 꽁꽁 얼어 붙었던 세상이 오늘따라 성깔 부리던 매서움을 누그려 뜨리고 바람도 없는 날이 눈꽃을 보존이라도 하듯 너무도 잠잠하여 만나는 장면마다 탄성을 지르지 않고는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목구멍을 마구마구 간지럽혔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올라 설천봉에 내렸을 때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그 너머를 보고 덕유산 참 좋구나 그 정도로 생각하고 향적봉으로 가는데, 키 작은 관목들의 가지들이 눈으로 치장한 모습이 푸른 바다에 물은 다 빠지고 하얀 산호만 남은 줄 알았다. 산은 순백색이고 하늘도 옅은 구름층으로 하얗게 하나가 되었는데 길게 터진 틈으로 드러난 하늘이 마치 파아란 바다같이 보였다. 그리곤 하얀 꽃밭 같은 관목들을 지나 향적봉에 서니 선계와도 같은 멀리 바라다 보이던 구름 속에 우뚝한 코발트색의 산이 지리산이 아닐까 추정되지만 난 "바로 저것이 수미산이구나"생각하니까 그것이 나만의 수미산이 되어 구도의 길을 떠나는 선재동자라도 된 듯했다. 수미산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볼 때 우주의 중심이며 바다 한가운데에 솟은 33천을 거느리는 상상의 산으로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에 제석천이 산다고 하는 곳이다. 수미산은 설산이라고 하니까 히말라야 산일 꺼라는 상상도 하는데 오늘 본 구름바닷 속에서 우뚝 솟아난 코발트색의 신비함을 드러낸 산이 나의 수미산 같았다.
향적봉을 지나 중봉으로 가는 길은 나의 수미산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점점 더 짖푸른색에 내가 스며들었다. 아름다운 구름띠와 거리에 따른 각각의 산줄기가 몇 개의 층으로 늘여놓은 색채 하며 양 옆으론 겨울산의 진면목이 생생히 눈 결에 드러난 하얀 산 주름들과 골골이 빚어낸 이랑들이 얼마나 멋스러운지, 겨울산은 단 두 가지 흑 백만으로도 모든 칼라를 무색게 하는 장엄함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돌아 돌아보며 중봉 가는 길에 이글루가 된 주목 가지 밑에서 점심을 먹고 약 20분 걸어서 가장 멋진 중봉에 섰을 때 멀리서 바라보며 마음에 품고 왔던 수미산이 눈앞에 선명할 때는 이제까지 찍었던 사진들은 다 버려도 좋았다. 그 황홀 지경에 빠져 한참을 헤어나지 못하다가 다음 코스인 백암봉 가는 길엔 바람까지 얼어붙어 바리케이드 줄에 달라붙은 눈이 묘하게 옆으로 날아가며 얼어 있었다.
높은 봉우리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둥글게 형성된 연무가 산을 에워싸고 있어 한눈에 지구는 둥글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듯 동그라미 속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동엽령을 지나 하산길에 들어서는 길인데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모두가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서 감히 누가 찡그리겠는가?
덕유산 설경은 이제까지 보아온 설경 중에서 가장 멋진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이겠는가? 앞으로 또 어떤 신비가 나를 놀라게 할지 난 이 겨울을 후회 없이 즐길 준비가 되어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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