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8
어제는 한라산에서 밤새 지은 집이 사상누각이 되었고 오늘은 기대치에 돌덩이 하나를 메다는 걸 잊어버리고 집을 나섰더니 또다시 나의 기대는 누군가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차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퍼 편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따뜻한 날씨에 새파란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서울에 두고 온 겨울은 잊어버린 체 봄 속을 걷는다.
겨울여행은 짐이 무겁다는 게 단점이다.별것도 없는 배낭이 옷의 무게만으로도 너무 무거워 자꾸만 뒤를 잡아당기는 듯하고 그 짐에 내가 속박당하는 느낌이다. 어제의 피로가 가시기도 전에 새벽 여명에 집을 나섰다. 오늘은 남원포구에서 시작해서 쇠소깍에서 끝나는 비교적 짧은 코스로 13.1킬로다. 제주터미널에서 남조로행 버스 730번을 타고 남원포구에 내려서 안내소에서 우선 수첩을 샀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올레길인데 올레꾼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 수고로움에 인정을 받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빳빳한 수첩 5코스란에 떡하니 도장을 찍고 나니 어떤 프로젝트가 주어진 느낌이다. 이 프로젝트의 기한은 나도 알 수가 없다. 언제 완주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건 반드시 좋은 성과로 끝날 날이 있으리라는 걸 안다.
먼저 큰엉 입구에 접어들어서 처음으로 올레를 걷는 친구에게 아는체를 하면서 내 기억장치의 버튼을 누르고 안내를 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5코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해안절벽이 1.5킬로미터나 이어지고 큰 바위가 바다를 향해 집어삼킬 듯 입을 벌리고 있어 큰엉(큰 바위)라고 한다는 말로 시작해서 좁다란 길 양편으로 덩굴식물들이 마주 우거져 숲 터널을 이루고 있는 이쁜 길을 한참 걷다 보면 바다 쪽으로 시야 공간이 우리나라 지도 모양으로 보인다는 설명까지 곁들여 사진을 찍어주고 큰 엉을 잘 보면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알려준 다음 친구들에게도 기억장치 하나를 달아준다.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처음 이곳을 지날 때 보았던 30년이 넘은 동백나무 울타리를 보고 이 엄청난 군락에 꽃이 핀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며 걸었던 그 기억에 드디어 꽃을 달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없다. 꽃이, 나무뿐 아니라 떨어져 누운 꽃잎조차 없다. 그뿐 아니라 그때 보았던 노란 감귤조차 수확이 끝나고 없어 내가 그렸던 5코스의 작품에는 노란 색과 빨간색이 빠져버려 어두워지는 순간에 섰다. 올해는 날씨가 너무 따뜻한 탓이라고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기후가 변하니까 자연의 순리에도 회로에 변화가 생기는 것 같다. 점점 더 기후변화가 오면 우리의 적응기는 당분간 카오스의 시기를 맞을지도 모른다.
꽃을 보기 위해선 또다시 `삼세판`이란 명제같은 것이 주어졌지만 세 번째는 꼭 잎만 무성했던 내 기억의 나무에 꽃을 달리라고 다짐하면서 중간지점의 도장을 찍고 한 바뀌 돌아 나오니 길가에 있는 상점에서는 설 대목을 맞아 감귤이 택배차에 가득 실리고 있었고 친구들도 한라봉 두 상자를 샀다. 한참 동안 위미리를 돌아 나와 조배 머들 코지에 이른다. 제주의 방언은 이름과 뜻이 매치가 잘 되지 않는다. 이름도 생소한 이곳의 유래는"마을의 번성과 인재의 출현을 기대하는 신앙적인 곳이라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일재 시대 일본인 풍수가 이 거석들을 보고 한라산의 정기가 모아져 위미리에 훌륭한 인물이 대를 이를 것으로 판단해 마을의 유력한 집을 찾아가 거짓말로 꾀인다. 이 괴석을 그대로 두면 가세가 기울어지고 안 좋은 일이 생기니 바위를 파괴해야 한다고, 이 말에 속은 김 씨라는 사람이 석공을 동원해 파괴했는데 그 후로는 촉망받는 인물이 나오면 단명하거나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말이 전해졌으나 요즘은 복원된 상태로 위미리 마을 주민들의 간절한 기원을 바라는 곳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장항 한 안내까지 마치고 앞 정자에서 간식을 먹기 위해 짐을 내려놓으니 너무나 홀가분해진다. 짐과 여행은 불가분의 관계다.
올레길을 몇 번이나 걷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계절을 달리 하니 처음에 못 보던 풍경과 또 다른 모습이 있고 여유가 있어 즐거움이 배가 된다는 걸 알았다. 동백꽃은 이미 갔지만 길가엔 벌써 유채꽃과 다른 이쁜 갖가지 꽃들이 피어서 일장춘뭉 같은 하루를 보냈다. 예정대로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는 길, 이제는 짧은 춘몽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갈 때다.
남원포구 해변
큰엉길의 아름다운 해변
큰엉(바닷가나 절벽에 뚫린 구멍)
위미리 동백군락
조배머들코지
사진카페
망장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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