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값진 시간에 찍은 내 인생의 한 순간들이다.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는 석룡산을 도마치 고개에서부터 시작한다. 때아닌 가을장마가 며칠째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잡힌 산행이지만 오후쯤에 개인 다고 해서 만반의 준비는 하지 않고 우산 하나 달랑 들고 나섰다. 큰 비도 아닌 것이, 안개도 아닌 것이 멎을 듯하면서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온몸을 적시는 날이었다. `정신적 요리는 마음의 부엌에서 만들어진다` 하지 않던가? 그러니 오늘 내 마음의 요리가 밥이 될지 죽이 될지 모르지만 이왕 불을 지폈으니 끝까지 해보는 거야. 그런데 오늘은 왠지 죽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살면서 다 치른 가시밭 길이 이즘에 새로 시작되는 걸 보면 역시 인생은 다 살아봐야 알 수 있어 뭐 그런 생각까지 하면서 걸었다.그리고는 아! 이런 길에서 훈련을 한다면 군인도 탈영하겠다. 속으로 별 생각을 다 하면서 진퇴양난의 수풀길을 스틱으로 헤치다가 그것마저 힘들어서 손으로, 몸으로 마구 헤치면서 올랐더니 억새풀,국수나무,싸리나무,딸기덩굴,등 인적이 드물던 길에 키를 넘는 젖은 수풀을 시퍼런 물이 들도록 부볐다.우산은 무용지물이 되고 방수가 될 것 같은 재킷도 속속들이 젖고 신발 속까지 젖었고 진흙은 떡이되어 달라붙고 다 젖은 무게에 힘을 빼앗기며 올랐지만 그 모습을 남기기 위해 사진까지 찍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런 길이 일부 구간이 아니라 석룡산 정상까지 그랬다.
힘들게 올랐던 정상인데 오호, 통제라! 아무리 여름 나무들이 키를 키워도 정상에 서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산세의 원경을 볼 수 있는데 안개비에 가려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고 눈앞엔 그냥 구름이 내려앉은 바다 같았다. 누가 석룡산에서 무엇을 봤냐고 묻는다면 그냥 "걸었어"라고 해야지. 그러나 다행인 것은 정상을 넘어서니 수풀은 그다지 우거지지 않아서 비교적 편안한 길을 쉬어가는 마음으로 하산했더니 조무락 계곡의 물줄기가 며칠간의 비로 인해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햇빛 쨍쨍한 날 같았으면 젖은 채로 물로 뛰어들고 싶었을 텐데 점심 먹을 때 정지해 있었더니 약간 한기가 들어서 겨우 체온을 올려 둔 뒤라 콸콸 내려가는 물줄기도 심드렁하게느껴졌다.
어떤 것이 좋다,나쁘다는 늘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잠시도 정지상태가 될 수 없는 마음의 조화 때문에 늘 달라진다. 오늘은 계곡에서 땀을 씻는 게 아니라 흙투성이가 된 바지 밑단과 등산화에 달라붙은 진흙을 씻어냈다. 그 맑고 좋은 물에다가.무게를 3킬로는 줄인 것 같다. 힘들었지만 끝나고 나니까 예측할 수 없는 날씨까지 피하면서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산행인 것 같고 온갖 날씨의 찐한 경험이야말로 산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일란 걸 새삼 느껴본다.
이번 산행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조무락 계곡에서 만난 물봉선이었다. 난 이제까지 분홍색만 봤는데 여기서 한꺼번에 물봉선이 흰색,노란색도 있다는 걸 알고 그 이쁜 모습을 담아올 수 있었던 것인데 내가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그 깊은 곳에 사는 꽃이 어떻게 내게 올 수 있었겠는가 생각하면 우중에 얻은 것이 있는 참으로 값진 하루였다.내가 모은 야생화의 한 페이지를 곱게 장식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