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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불갑사 꽃무릇

반야화 2017. 9. 20. 13:36

가을 하면 계절을 대표하는 국화꽃이 생각난다. 가을꽃의 개념에 대해서 그게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알고 있는 것만이 진리라고 믿는 게 가상 진리다. 언젠가부터 가을꽃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 있다. 나의 가상 진리를 깨어버린 가을을 대표하는 꽃, 꽃무릇. 그 아리따움을 어떻게 표현할까? 표현의 능력을 다 동원하자면. 꽃의 팜므파탈, 비교를 허용하지 않는 절륜한 꽃, 절대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매혹적인 자태. 그리움을 쏟아낸 해탈의 색채 그밖에 더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상사화,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리움의 의미로 피어나서 그 깊이만큼 꽃대를 키우고 작은 꽃송이 예닐곱 개가 모여서 하나의 큰 꽃송이가 되어 있고 빠빳한 붉은 마스카라로 말아 올린 긴 속눈썹을 달고 농후한 화장을 하고선 호접을 유혹하는 자태다.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사를 간다.

 

상사화 축제기간을 맞아 인파가 너무 많을 것 같아서 예정된 코스를 거꾸로 용천사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기로 하고 세 시간 정도를 달려가는 중에 장성을 지나자마자 시야에 들어오는 상징적인 장면이 있어 일시에 환호성이 터진다. 차도 옆에도 논둑에도 밭둑에서 숲 속에도 온통 꽃이다. 그리고도 한 시간을 더 가서 광암저수지에 도착하니 호숫가에도 꽃이다. 잠시 행장을 꾸려 모악산 들머리로 들어서는데 첫 발걸음부터 온통 붉은 바탕색 위로 걸어간다. 함평군에서 시작해서 영광군으로 넘어가는 모악산이 꽃무릇의 유명세를 타고 산 이름도 불갑산으로 개명을 했다.

꽃에 취한 비틀거림도 잠시, 바람 한 점 없는 날씨가 너무 덥고 습하고 시작부터 소금욕을 하면서 오른다. 천금을 주고라도 바람 한 점 사고 싶은 심정이다. 이상하리만치 올 들어 얼굴에서 땀이 많이 나는데 눈도 짜고 입술도 짜다.

 

걸으면서 너무 힘이 들어 잠시 생각에 잠긴다. 주역을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 상태가 가장 신경 쓰이던 부분이었던 내 몸이 `천지부`의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음양오행설에서 인간도 소우주인만큼 우리 몸도 지천태 괘상으로 시작해서 천지부 괘상으로 끝나는 것. 양기가 밑에 가득하고 음기가 양기를 누르고 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양기가 위로 올라오면서 양기가 하늘로 날아가버리면 그것이 죽음이라고 한다. 지금 내 몸의 양기는 아마도 가슴 위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걷는데 다들 나와같은지 헉헉대는 소리가 들린다.

 

산 이름에 악자가 들어가면 악한산인데 그렇지 않네라고 생각하면서 밋밋한 모악산(불갑산) 정상을 향해가는데 8부 능선까지 오르니까 그제야 이름값을 하는 구간이 나온다. 가파르게 올라가는데 인파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잠시 착각을 했다 주말인 줄 알았더니 평일인데도 그렇게 사람이 많아서 비켜다니기도 힘들었다. 축제기간이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나부터도 그렇고 잉여인력이 이렇게 많은데 이 인파가 생산성에 투입된다면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올라가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힘들게 정상인 연실봉에 올라서 인증사진을 찍는데도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겨우 한 컷 누르고 백해서 잠시 내려오는가 싶다가 다시 능선 따라 가는데 이번에는 장군봉, 투구봉, 법성봉, 노적봉 몇 개의 봉우리를 거쳐 가는 동안 암릉구간에선 옷깃을 스치는 인연도 만들지 못할 정도로 밑으론 천 길 낭떠리지고 길은 외줄기여서 아찔한 구간을 지나는 동안 더운 땀이 아니라 공포의 진땀이 났다. 봉우리를 다 내려서니 호랑이굴이 나온다. 이 굴에는 실제로 호랑이가 살았는데 주민들에 의해서 덫으로 잡혔고 일본에 팔렸다고 한다.

 

호랑이굴을 지나 덫고개에서 불갑사로 내려오는데 한창 달아올랐던 몸이 서서히 식으면서 개울물도 만지고 불갑사 경내로 들어섰더니 산행 들머리에서 이미 놀랐기 때문에 환호성은 나오지 않았지만 미적인 가람배치의 곡선과 잘 어울리는 꽃이 그림 같았다. 천년고찰이지만 몇 번의 개축이 이루어지고 현재에 이르는 동안 옛 모습은 딱 한 군데 일광당뿐인 것 같았다. 일광당은 단청도 입지 않았고 기둥은 나무 모양을 반듯하게 깎지도 않은 채 껍질만 벗겨서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아랫부분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어 잠시 세월의 무게에 경건함마저 들게 했다. 그리고 아래쪽 넓은 뜰에는 잎이라곤 없는 그리움에 목마른 붉은 선혈 같은 상사화가 빈틈없이 메워져 있는 것이 작위적인 감마저 들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꽃에서 나비처럼 나부끼며 놀고 있지만 꽃 속에 있는 사람들은 꽃다움에서 멀어진 중 노년층이 거의다. 꽃다움에서 멀어졌으니 나 또한 한없이 꽃이고 싶은 마음에서 꽃물을 들이고 싶은지도 모른다.이 아름다운 꽃에 날아든 날 하필이면 하늘은 온통 먼지로 덮여 있지만 마음만은 우아하고 값진 풍경으로 해맑게 놀 다간다.

 

용천사 들머리

 

산에도 꽃

 

 

호랑이굴

 

 

 

 

 

불갑사 정상

 

 

 

 

 

 

 

 

 

 

일광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