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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도항과 누에섬

반야화 2023. 9. 20. 14:00

우리나라를 행정구역으로 나누었을 때 가장 방대한 경기도를 다 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경기도에 둘레길이 생겼지만 워낙 많은 지역이 포함된 길이고 둘레길이 길고 교통여건도 좋지 않으니 아무리 트레킹마니아인 우리들이지만 전체를 완주한다는 건 불가능해서 이번에는 경기도 서해 쪽  트레킹을 처음으로 했다.

탄도항 주차장에 차를 두고 탄도항에서 누에섬까지 썰물 때만 드러나는 시멘트 길이 있다. 제주올레길을 완주한 후에는 주로 산길만 걷다가 오랜만에 서해 쪽을 걸었다. 잠잠할 날이 없는 제주의 바닷길은 맑기는 청옥빛이지만 서해는 그에 비하면 바다의 다른 종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흐린 빛이다. 물빛이 흐리다고 물 자체가 흐린 것이 아니듯이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바탕이 어떠한가의 차이다. 겉보기만으로 판단하는 건 오류를 낳는다.

갯벌이 바탕인 해안은 흙빛이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바다는 푸르게 변하고 해안에서 바라보면 색이 다른 몇 개의 수평선으로 보이는 것 또한  다른 아름다움이다. 오전에 활짝 열린 바닷길로 누에섬까지 걷는데 갯벌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저서생물들의 대화 같은 짜작짜작 하는 소리가 들리고 먼바다 끝에는 장벽 같은 흰구름을 세워둔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환상적인 날씨와 더불어 명징한 풍경에 넋을 놓았다.

하늘이 맑기만 하면 해를 가릴 뿐 쳐다볼 일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푸른 건 하늘의 진면목이니까 하고 무심해진다. 그러나 푸른 창공에 목화 같은 구름을 펼쳐 놓으면 한 없이 바라보게 되고  누군가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어 추억 한 페이지로 저장된다.

우리들의 각별한 취미 때문에  언제 어디를 가든 사계절의 다름과 특별함을 한아름씩 얻어온다. 장마철도 마다하지 않고 버섯을 찾아 담고, 봄에는 온갖 야생화를 고이 담아 오고, 가을에는 앞서 간 계절들이 남긴 결실인 온갖 열매들을 가득 담아 온다.

사계절의 모든 날들이 우리를 매료시킨다. 그 이유는 우리에겐 자연에 대한 심미안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서쪽하늘 가득한 노을에도, 이쁜 꽃 한 송이에도 무심할 수 없음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산다는 것이 단순하게 숨만 쉬는 게 아니라 살고 싶은 대로 산다는 것이다. 인생후반전이 되면 누구나  살고 싶었던 대로 산다는 걸 목표로 하겠지만 거기엔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 건강과 시간과 여유다. 삶이란 호흡하고 존재하는 그 이상으로 가슴을 무엇인가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어야 한다.

탄도항에서 물이 빠진 바다에 누에섬으로 들어가는 길이 드러났다.



탄도항에서 보이는 제부도.

누에섬, 작은산 위에 등대가 있고 둘레를 걸을 수 있는데 산에는 못 올라게 막혀 있다.
세개의 풍력발전기가 있는데 그것이 전기보다는  풍경을 위한 조형물 같다.그것 때문에 노을 속 배경이 되어 누에섬이 일몰풍경의 명소가 된 듯 하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어컨을 켜고 책 보는 것이 하루의 일과이자 피서였다. 가을이 되니 독서대의 책은 덮여 있고 책갈피는 다음장으로 넘어가지 못해 갑갑장을 느끼는 듯하다. 이렇게 좋은 계절을 어쩌란 말이냐. 나보다 책갈피가  책의 내용을 더 잘 알 것 같다. 이미 난 앞장들의 내용을
까막었으니......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싸리꽃도 이렇게 이쁘다.








돌장난



누에섬을 돌고 궁평으로 이동해서 궁평해안길을  맨발로 걸었더니 갇혔던 발이 해방되니 온몸도 해방감을 느낀다.


물 빠진 서해의 갯벌 고인 물에  하늘과 구름이 담기고 먼바다에는 반짝이는 윤슬이 눈이 부시다. 동해의 푸른 물색이 아니어도  네 가지의 평행선을 바라보는 일망무제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아, 남을 따라 행복을 찾아갔다가/눈물만 머금고 돌아왔습니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기에.**

카를부세의 시가 이 시간에 이렇게 어울릴 줄이야,
모퉁이를 돌고 돌아 어느 큰 바위에 맞뚤린 멋진 바다 굴이 있다기에 땡볕 해안가를 걷고 또 걸었지만  밀물 때가 다 되도록 찾지 못했다. 먼저 본 적이 있는 친구는 궁평바닷가 해솔공원에 자리 깔고 쉬겠다며 거길 가보라고 한다. 가면 있겠지 했던 산너머 저쪽은 결국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 조그마한 구멍 하나를 그곳이라 생각하고 조개무덤에 앉아 시 한 수를 낭독했다.  

모래, 갯벌, 윤슬, 배경이 된 산의 모습들이 마치 암석의 지층같이 보이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궁평해안. 오늘 17킬로를 걸었다. 이만하면 족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