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유안진 시인
1992년, 우리가 서울로 이사를 왔고 그 생활이 너무 낯설고 적응이 안 되다가 어느 날 방송국에서 주부백일장이라는 프로에 한 편의 글을 쓴 것이 방송을 타고 당시 서울대 교수님으로 재직하시던 유안진 교수님이 심사를 하셨기 때문에 20년이 넘었지만 생생히 기억이 된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쓴 것이 입선이란 연락을 받고 참 부끄러웠다. 그동안 늘 책을 보면서도 이분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인데 시인님이 안동 출신이고 책 속에는 고향도 내 고향과 이웃 고을인 데다가 내가 아는 동네들이 총출동하는 바람에 신기하기도 하고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어떻게 정리를 할까 생각다가 먼저 가장 핵심적인 걸 먼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명문가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명쾌한 전주 류 씨 종부의 자부심 가득한 장면에 멈추었다. 명문가란?
1. 사방 30리 안에 동성동족이 문중을 이루고 살아야 한다.
2. 벼슬살이 내력에 매관매직한 적이 없어야 한다.
3. 딸들을 왕실에 밀어 넣어 딸을 팔아서 부귀영화 누린 일이 없어야 한다.
4. 나라가 잘 못 되면 목숨 내놓고 임금의 실책을 간해야 한다.
5. 좌우 앞 뒤 역적과 혼인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추어야만 내로라하는 명문이 되고 이게 바로 영남 유림들을 알아주는 까닭이라고 후대에 일러주는 대목이다. 여기 한 대목도 부에 관한 것이 없다. 다만 대쪽 같은 절개가 느껴질 뿐이다.
이런 요건들을 갖춘 명문가는 현실에서는 이어지기 힘든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부를 최고로 알고 명예를 팔아서 부를 사려는 치졸들만이 들끓는 세상에 이런 덕목을 한 번이라도 접한다면 마음가짐이라도 고쳐볼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명문가의 권위를 지켜내기 위해선 개인의 사생활이나 개인의 행복쯤은 희생이 되어야만 했던 비극도 더러 있었다. 책 속에 화자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인생 중반에 알게 되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서 겪는 분노와 복수심 그런 것들이 표출되고 그러나 족보를 바로 잡지 못하는 대신에 자연스럽게 다른 경로로 복수를 대신해 주는 일이 생긴다.
본론은, 댐을 하나 건설하기 위해선 수많은 마을과 추억과 고향이 수몰되어야 하는 과정이 진행되지만 그 어려운 것이 하루아침에 될 리가 없다. 그러나 화자의 마음속엔 댐 공사가 꼭 성사되어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양반의 집성촌과 종가의 용마루에 올라서서 다 망해버리라고 외치고 싶어 한다. 그런 중에 임하댐 건설이 추진되고 그 일로 인해서 전주 류 씨 시조였던 5형제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던 5실 다섯 개의 마을이 수몰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화자는 내심 그것이 꼭 이루어지길, 그래서 일가에 복수를 대신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마을을 지나던 무당이 흘리고 간 한 마디는 3 여자의 한이 눈물이 되어 마을을 묻어버릴 거라고 한다. 바로 댐 건설이 현실이 되고 집성촌 5개가 다 수몰이 된다는 예언이다.
3 여자란 화자의 할머니, 어머니, 본인이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개인의 삶이 희생이 되어 불행을 겪었고 끝내 손녀의 뿌리를 바로잡지 못하고 여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솔 씨 절명 기란 본인의 기구함을 글로 남겨서 함께 살지 못하고 평생 그리워하던 딸에게 주고 그 딸 역시 어린 조카의 생사도 모른 채 살다가 사후에 우연히 화자의 `한국 종부의 삶`을 취재하던 차에 그 자료들을 손에 넣게 된다.
화자는 할머니 손에 크면서 고향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키워졌으며 다행히 훌륭한 사람이 되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알고 나서 분노한다. 할머니는 가문에서 강제 출거 되어 임신상태 인즐도 모른 채 칼을 입에 물고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은 구했지만 평생 성대를 다쳐서 벙어리로 살고, 할머니 딸, 화자의 고모는 종손인 남편이 독립운동 때문에 외국에 떠돌다가 생사를 모른 채 후손을 남기지 못해 양자를 키우면서 가문을 지켜나간다. 화자의 아버지 또한 출거 당한 어머니의 비밀을 알고 나서 분노를 삭이지 못해 공산당에 가담해서 종가를 괴롭히다가 공비소탕 작전에 총 맞아 죽고 어머니는 공산당에 강겁을 당하고 목을 매 죽는다. 이 기구한 운명의 시작은 경술국치가 이루어지던 때에 왜인들의 간교한 조작 때문이다.
그때 5실 전주 류 씨 문중에서 국치를 반대하면서 옷을 찢어 혈서를 쓰고 했는데 할머니의 친정 오라 버지가 조일 합방은 불가불가(不可不可)라고 거듭 주장했는데, 일본 놈들은 해석을 달리해서 (不可不) (可)로 해석을 해서 조일 합방을 불가하지 않고 가능하다는 뜻으로 조작해서 오라 버지는 친일로 몰린다. 불가 불이 아니라, 불가불가라고 아무리 변명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후한이 두려워 가족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한다. 이렇게 해서 왜인들의 교활함과 오라비의 경박함이 한 집안과 조선 양반 영남유림 심 씨 할머니 친정을 망치고 만다. 이리하여 명문가 전주류 문의 둘째 종부가 매국노 집에서 왔고 친 남매라는 이유로 내침을 당하면서 대대로 불행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시작의 불씨는 외가 쪽인 할머니 친정 오라 버지의 친일 아닌 친일로 몰리면서 두 집안이 풍비박산이 된다.
결국에는 20년 넘게 끌던 댐 공사가 시작되어 집성촌은 외지로 집단 이주를 하고 전주 류 씨 집성촌 5개 모두 수몰이 되면서 화자의 복수심이 성사가 되는 셈이다. 500여 년을 지켜 나가던 명문가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랫동안 지켜질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번 안동 여행에서 느꼈지만 종택이 잘 보존되고 명문가의 명성도 잘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