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가고 싶었던 곳을 가는 날은 기대치도 배가 된다.
우리나라 지형을 떠받치고 있는 듯한 발 뿌리 같은 크고 작은 섬들을 거느리고 있는 다도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고흥반도를 무척 보고 싶었으나 몇 번의 기회를 놓치고 그 마음 버리지 않고 있으니 다시 기회가 왔다. 볕 좋은 가을날,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 속을 스치며 달려가는 차창 밖은 내 손 하나 거치지 않았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움을 느끼는 들판이 너무 좋아서 저토록 잘 키워준 농부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판의 벼이삭처럼 고개가 숙여진다.
남도여행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즐기려는 건 무위무책의 아만이 되는 것 같아 기꺼이 목적의 배의 시간 투자를 한다. 그래도 좋은 무언가가 늘 내면을 채워주기 때문이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서 오전 11시가 되어야 도착하고 산행이 시작된다. 그러다 보니 산을 오르기 힘든 시간대가 되어서 땀을 많이 흘리게 된다. 한여름이 지났으니 문제없을 줄 알았더니 가을 속에 여름이 빼곰이 얼굴을 들이밀면서 "나 아직 요기 있네" 하는 것 같다. 피한다고 다 피해진다면 무슨 해를 입겠는가. 피해왔던 땀줄기를 한꺼번에 다 쏟아내면서 올랐다. 전 날 비가 와서 산길은 촉촉하고 좋았으나 습기가 남아서 바람도 없는 산행이 무척 힘들었다.
산행을 하다보면 숱하게 만나는 명찰이 있지만 안을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칠 때가 많기 때문에 이번에 능가사는 혼자서라도 살펴보기 위해서 남보다 서둘러 걸었다. 능가사는 호남지방 4대 사찰이며 고흥 팔경에도 속하고 무엇보다 비록 중창된 사찰이지만 그 역사는 417년 눌지왕 때 창건된 대웅전은 보물 1307호로도 지정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그런데 너무 뒤떨어지면 따라가기 힘들어서 겨우 경내만 들여다 보고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이것은 산행 중에 있는 영원한 숙제다. 잠시 서서 반배를 3번 올리고 산 위를 보니 마치 능가사가 8봉을 이고 있는 것도 같고 능가사를 후광처럼 비추면서 싸안고 있는, 절과 하나 된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주차장이며 야영장 등 편의시설도 아주 잘 갖추어진 깨끗한 환경이었다.
능가사를 지나자 세월의 이끼꽃이 핀 부도들이 있었는데 이 역시 유형문화재 246호로 지정된 400여 년이 된 추계당과 제자인 사영당의 부도였다. 일반인들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이지만 이 시대에는 나올 수 없는 사리탑이고 현시대에는 사리가 나올 정도로 공부를 히지 않는 승려들이 불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어 안타까운 현실이 된 듯하다. 그래서 더더욱 부도를 보면 법당 안에 찬란한 불상보다 깊은 경외감이 들게 된다. 부도를 지나자 등산로 입구에 거대한 팔영 소망탑이 있다. 명산 입구에 흔히 있는 표지석에다 소망을 하나 더 붙여두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만 소망 하나쯤 가슴에 꼭 담고 정상에 서면 다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올랐다.
흔들바위라고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아 마당바위로 개명하고도 역시 어울리지 않는 큰 바위 쉼터에서 쉬면서 꽁꽁 얼려온 매실물을 달구어진 몸속으로 사정없이 쏟아부었더니, 아, 얼마나 맛있고 시원하던지 어떤 보양식보다도 더 내 몸이 반기는 듯했다. 땀 젖은 몸에 바람 한 줄기 베어 들기를 바라면서 드디어 한 능선에 죽 늘어선 제1봉에 올랐다. 1봉은 팔영산의 첫인상인데 첫인상이 좋으면 그 사람한테서 헤어나지 못하듯이 앞으로 이어질 봉우리들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을 것 같았다. 점점이 흩뿌려놓은 다도해와 고흥 들판의 노란 색채는 그림 같고 우뚝우뚝한 암봉들은 저마다 붙여진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듯했다. 그리고 산천은 어느새 여름 속에 가을 한 자락이 베어 들고 있어 그 싱싱하던 여름의 녹음이 젊음 속으로 늙음이 나도 모르게 조금씩 베어드는 내 모습 같아 한편 사위어져 가는 푸르름이 아프기도 했다.
흔히 있는 이름의 명칭이 팔봉이 아니라 팔영이라고 지어진 유래가 여럿 있었지만 나는 보이는데로 비췻빛 잔잔한 바다에 산 그림자가 어린 그런 상상이 한 폭 자리 잡는 그림이 연상되었다. 기분 좋은 첫인상을 안고 거쳐가는 여덟 개의 봉우리에서는 같은 풍경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면서 지루하지 않게 지나간다. 그런데 산세는 악산이라고 해도 될 만큼 험했다. 거대한 암봉이 다 하나의 독립적인 산 같은데 철계단이 되어 있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어느덧 중간을 지나고 5봉 밑에서 점심을 먹는데 온통 진 자줏빛 달개비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어 너무 이뻤다.
점심 후 바로 수직의 계단을 오르려니 더욱 버거워서 팔다리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봉우리 사이가 많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니어서 팔봉까지 지루할 틈 없이 다 지나고 가장 높은 깃대봉으로 간다. 뭐가 더 있을까 궁금증에 이끌려 갔더니 봉우리 자체는 별거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능선에 줄지어 늘어선 팔봉이 한눈에 들어온 게 특징이다. 장관이었다. 내가 힘들게 지나온 풍경들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깃대봉은 놓쳐서는 안 될 곳이었다.
깃대봉을 잠시 빽해서 다시 능가사로 하산하는 길에는 반대편에 있는 팔영산 휴양림의 편백나무 숲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줄 편백나무 숲도 조금 있고 계곡으로 내려오자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고생한 발을 식혀주며 지친 나의 하루를 맑게 정화하고 늦은 가을 오후의 맑은 햇살로 다시 들어오니 눈이 부셨다. 고흥 팔영산, 도립공원에서 국립 다도해해상공원으로 승격한 품격이 느껴질 만큼 너무 멋지고 꼭 가봐야 할 명산이었다.
능가사 경내에서 본 팔봉
대웅전 앞인데 마치 근정전에 어도를 중심으로 문,무를 갈라서게 했던 어전 앞 마당같다.
17세기에 조성된 추계당과 사영당의 부도. 둘은 사제간이라고 한다. 석종형이 추계당 부도.
흔들바위라고 했다가 흔들리지 않아 이름을 마당바위로 바꾼 것.
제1봉 유영봉에서 바라본 선녀 봉인데 팔봉 줄기에 서지 못하고 뚝 떨어진 맞은편에 있다.
아마도 거칠고 남성적인 바위에 끼고 싶지 않아서 고고하게 홀로 서 있는듯하다.
1봉에서 바라본 산 사이의 농지들
돌아본 1봉, 꼭대기가 깎아놓은 듯 반듯하다.
앞쪽으로 바라본 2봉
돌아본 2,3봉
4봉에서 본 5봉
다도해와 드물게 보이는 촌락의 풍경
6봉으로 오르는 철계단이 거의 수직이어서 보는 마음도 아찔하다.
어디서나 보이는 선녀봉
6봉과 겹쳐 보이는 두 여인들이 봉우리를 능가하는 미모.
멋진 팔봉, 잘 생긴 봉우리라도 내가 올라서면 그 모습은
등잔 밑이 되기 때문에 바라보면서 찍는 게 좋다.
8봉까지 다 지나고 가장 높은 깃대봉으로 가는 숲길
깃대봉에서 보면 능선 줄기에 봉우리가 한눈에 보이는 풍경이 있다.
하산길의 편백 나누 숲
하산해서 능가사 주차장에서 본 팔봉 풍경
능가사 앞에 수호신처럼 서 있는 고목, 고목이라고 하기엔 아직도
무성한 잎을 다분히 달고 있는 젊은 신목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