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속에 숨겨두었던 보물들을 다
꺼내 보여주는 봄이 오니까 내 마음에도 무엇이
숨었는지 다 꺼내놓고 싶다.
보이는 것이 다 시가 되는 이 봄이 너무 좋아 이쁜 시를 뒤적이는
마음을 우선 보여야지.
와운산방
장석남
그 집은 아침이 지천이요
서산 아래 어둠이 지천
솔바람이 지천이다
먼지와 검불이, 돌멩이와 그림자가 지천이다
길이며 마당가론 이른 봄이 수레째 밀렸고
하늘론 빛나며 오가는 것들이 문패를 빛낸다
나는 큰 부자가 되기를 원했으므로
그 부잣집에 홀로 산다
쓰고도 쓰고도
남고 남아 밀려내리는 고요엔
어깨마저 시리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 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무제 1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와요
안현미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 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하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