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초가을 백록담
제주에 와서 한라산을 오르지 않고 떠나면 뭔가를 빠뜨린 것 같아 마음이 허허롭게 된다. 그래서 팍팍한 일정에서 하루를 빼서 가장 좋은 날에 오르자며 남겨 두었던 날이 하필이면 구름이 가장 많은 날이다. 일기예보도 믿을 수 없게 하는 곳이 한라산이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한라산의 얼굴이니까 아마도 정상에 설 때쯤이면 우리를 위해 백록담은 보여주겠지 하는 믿음으로 부지런히 올랐더니 감사하게도 잠시 구름을 걷어주셨다. 사계절을 올랐지만 오늘처럼 더 크게 더 넓고 가깝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갈 때마다 눈 덮인 흰색이거나 검은색만 봤는데 초가을의 백록담은 어느새 소복이 가을의 정취를 담고 있었으며 바닥에 풀들까지도 노랗게 가을을 담아내고 그 위로 운무까지 내려앉아 효과를 주니까 가을 수채화의 한 폭이 완성이 되었다.
백록담을 내려오다가 사라오름으로 갔다. 사라오름은 한겨울의 설경이 너무 좋았고, 한여름의 물이 가득 찬 아름다운 풍경만 봤기 때문에 혹시 갔다가 실망하면 어쩌나 약간 걱정되는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그냥 가면 또 후회될 것 같아 올랐더니 명산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폭우가 온 것도 아닌데 바닥엔 물이 고여 있었고 반 바뀌 돌아서 사라오름 전망대에 섰더니 점차 구름이 갈라지고 한라산 동부 능선의 드넓은 자락에 구름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산 그림자 구름 그림자가 내려서 마치 강물이 흘러가는 듯이 보였다. 그렇게 구름은 잠시 흩어져서 우리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여주었다.
한라산 10시간을 등산하고 나면 일주일 정도는 종아리와 허벅지 쪽이 아팠는데 아직도 더 걸어야 할 올레길이 남았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걱정이 된다. 무엇보다 발이 걱정이다. 그래서 한라산 등산을 앞에 넣을까 뒤에 넣을까를 아무리 생각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일 것 같아 그냥 날씨 좋을 때 가자고 했는데 구름은 많았지만 감사하게도 볼 걸 다 보여주신 한라산 산신께 감사한 마음이다. 내일도 우리는 길 위로 출근을 하고 길 위에서 퇴근을 한다.
사라오름
사라오름에서 보는 서부능선 자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