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제천 월악산

반야화 2015. 2. 25. 13:04

코스: 수산교ㅡ보덕암 ㅡ 하봉 ㅡ중봉  ㅡ영봉 ㅡ덕주사

구정 연휴 지나고 모두가 몸이 찌뿌듯할 텐데 때마침 월악산 산행이 잡혀서 게으름 피우던 근육들을 일제히 깨우는 느린 걸음이었다. 미세먼지 걱정을 했더니 다행히 현지에는 날씨도 포근하고 하늘도 좋아지고 좋은 산행이 되겠구나 했더니 가시거리가 좋지 않아서 그 좋은 풍경들이 연무 장막에 가려져서 다 드러나지 않음이 너무 아쉬운 하루였다.

 

가장 아름다운 건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라 했는데 처음 본 월악산 하봉, 중봉, 영봉이 그러했다. 아름답다 못해 신비감마저 주는 나에겐 또 하나의 `처음`이다. 다 알고 가는 곳은 변화를 기대하고 가지만 처음 가는 곳은 기대감으로 간다. `과거는 기억이고, 미래는 기대`라고 하지 않던가. 처음 경험하는 곳이 많은, 나에겐 아직도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많은 산행이 남았다. 그래서 제2의 인생이라는 청춘에서 청춘을 찾고 있다.

 

보덕사에서 하봉으로 가는 길은 군데군데 얼고 녹아서 아이젠을 착용하기도 불편하고 안 하고 걷기엔 불안한 길을 그냥 오르는데 다져진 얼음이 걸음을 더디게 했다. 참 힘들었다. 힘든 끝에는 언제나 그만한 보상이 따르니까 불평 같은 건 없다. 하봉에 오르면 바라다 보이는 충주호의 굴곡진 흐름이 멋진 풍경인데 만수위를 이루지 못하는 충주호와 흐릿한 날씨가 기대감에 미치지 못했으나 장소만큼은 이미 영봉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만큼 좋은데 영봉이라면 얼마나 더 좋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한참을 지나자 멀리 중봉이 보이는데 그 역시 영봉으로 착각하면서 다가갔다. 이런 마음도 처음인 자들만의 경험이다. 가는 길은 아찔아찔하지만 칼바위 능선 같은 위태로운 곳에 장대하게 솟아 있는 중봉의 위상은 발 밑의 아찔함을 잊게 했다. 거기다가 하얗게 상고대까지 입고 있으니 한없이 바라보고 싶은 아름다운 풍경 그 꼭대기에 자리 잡은 쉼터에 미리 간 사람들의 모습까지 꿈틀대며 나를듯한 절묘함이 보여서 나도 빨리 가야지 했으나 꽁꽁 얼어있는 길이 쉽게 허락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선녀들의 나들이 모습 같던 중봉 쉼터에서 점심을 먹는다. 산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를 거야. 언제나 최고의 밥상을 찾아서 오찬을 즐기는 기쁨을, 오늘도 지상 최고의 밥상에서 풍경의 반찬까지 얹어서 즐기는 이 거룩한 의식을.........

밥을 먹고 오르는 길은 언제나 치받히는 포만감 때문에 더 힘든다. 하봉, 중봉만 해도 말할 수 없이 좋은데 영봉이라면 과연 어떠한 멋을 지니고 있을까! 부푼 기대감이다. 그런데 영봉이 보인다. 신령함이 느껴지는 영봉은 2월 하순에 주는 선물 같은 설경이 꿈속같이 아름다운 몽환적 심미를 자아냈다. 흔히 눈꽃을 상고대라고도 하지만 오리지널 상고대는 지나가는 구름도 얼어붙고 밤새 내리던 서리가 얼어붙어 마치 튀김 직전에 밀가루 옷을 입은 것 같은 나뭇가지들이 진짜 상고대다. 난 오늘 그것을 보고 있다. 신령스러운 영봉에 2월 하순의 상고대, 그 앞에 서서 가슴 뭉클한 순간을 맞는다. 몸에는 땀이 나는데 영봉의 기온이 얼마나 차가우면 아직도 날아가지 않고 저리 곱게 치장을 하고 있을까 싶어 고마운 생각까지 들었다. 바라보던 영봉에 비하면 그 자리에 서서 보는 영봉의 풍경은 너무 아쉬웠다. 사방으로 펼쳐진 산세를 선명이 볼 수가 없었다.

 

오래 머물면서 놀고 싶지만 언제나 그렇듯 산행에서는 만끽보다는 짧은 순간의 영원한 기억으로 두는 게 더 좋은 것 같다. 그 아름다운 곳 영봉을 내려오니까 길이 이상하게도 다시 영봉 쪽으로 유턴하는 듯했다. 가다 보니 바로 영봉의 뿌리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영봉 밑을 지나 좀 떨어진 곳에서 보는 영봉의 반대편은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서 마치 달을 보는 것 같았다. 달의 이면 같은 영봉의 다른 모습, 달은 죽은 별이지만 태양을 만나면 금방 생명을 얻는다. 아름다운 이면은 님 한 번 만나지 못해 얼어붙어 속앓이를 하는 차가운 슬픈 별이다. 오늘의 영봉은 한쪽 면은 너무 이름답고 이면은 달의 차가움 같은 회색 벽이 달의 양면과 같아서 지상에 내려앉은 낮달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제  덕주사로 하산하는 길만 남았다. 많이 올랐으니 그만큼 내려가는 길이니 쉽진 않겠지만 깎아지른 낭떠러지 길을 다 내려오니 오후 한나절 따스한 빛을 받으며 포근히 잠겨 있는 마애불 앞에 서니까 엄청난 불상이 들어 있다. 마애불은 석공이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속에 들어 있는 모습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거라고 한다. 배석을 보는 순간 그런 느낌이 확 와닿았다. 그리고 망국의 한을 품은 덕주공주의 화신일지도 모른다는 전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신라를 떠났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나마 신라를 바라보고 싶어 차라리 불상이 되고 싶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이 곳곳에 배어 있는 월악산은 `악`자가 붙은 이름이 순한 산세는 아니겠지만  산의 심성이 악한 게 아니라 다만 훈련이 되지 않은 아무나 갈 수 없다는 경고의 이름이지, 나라 잃은 공주를 오 년씩이나 품어 주었던 걸 보면 월악산은 분명 착한 심성의 넉넉하고 포근함 인자함이 보이는 산이다. 덕주사를 지나 밑으로 내려오면 내성인 산성이 있고 입구 쪽엔 외성인 석성이 겹겹이 돌을 채워 넣어서 쌓은 항몽유적지인 난공불락의 산성이 있다. 좀 더 주위를 살펴보면 볼거리가 많을 것 같은데 길은 멀고 날은 저물고, 나머지는 다음으로 미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한 주를 건넜다고 몸은 금방 그것을 안다. 3일은 쉬어야 될 것 같다.

 

 

 

 

 

 

 

 

 

 

 

 

 

 

 

 

 

 

 

 

 

 

 

 

 

 

 

 

 

 

 

 

 

 

 

 

 

 

영봉의 반대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