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수풀 역사순례길
2018.3.10일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든 그곳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여행의 재미가 배가 되고 현장을 이해하기가 쉽다.
제주는 항쟁이 많았던 도시다. 크고 작은 항쟁 중에 대표적인 대몽항쟁, 4.3 항쟁을 꼽을 수 있다. 그저께는 삼별초 유적지도 봤고 오늘은 4.3 유적지가 있는 한수풀 역사순례길을 간다. 시작점인 옹포리 포구에서 출발해서 만뱅디묘역까지 가는 길이다.
숙소를 서귀포에 잡은 건 처음이다.서귀포 엠스테이 호텔에서 이틀 굶은 잠을 달게 자고 일어나 창을 여니 눈앞에 춘설이 희끗희끗한 한라산 정수리가 보인다. 한라산은 언제나 구름에 가려지는데 아, 좋다. 그 흔한 구름 한 자락 걸쳐두지 않은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다. 잠시 감상한 다음 조식을 먹고 나와 길잡이가 되어줄 올레님을 만나 동승하고 달려가는데 날씨가 얼마나 투명한지 보이는 모든 것이 윤기가 나고 반짝이는 기분 좋은 아침이다. 바람도 잠잠하고 기온까지 포근하니 꽃 몇 송이가 더 피어날 것 같은 봄이다. 날씨 하나만으로도 하루가 행복할 시작이다.
봄이 와서 꽃이 피었나,꽃이 피어서 봄이 왔나. 봄과 꽃 그 어원이 무엇인지 곱씹어 보면 참 이쁜 우리말이다. 불가분의 두 글자를 마음속에 담고 순례길에 들어서는데 먼저 담장 너머 매화가 하얀 미소를 날려 보낸다. 그리고 길을 걷는 동안 제주의 봄꽃을 다 만난 셈이다. 동백, 매화, 유채, 수선화, 로즈메리 꽃 그리고 씨 뿌린듯한 한 밭 가득한 광대나물 꽃 개불알꽃 등.
옹포리 포구에서 길을 찾는데 표지판이 잘 보이지 않아서 힘들게 명월성지까지 갔다.그동안 제주에 대해 모르는 걸 또 한 가지 알아가는 중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3개월만에 제주목사로 부임해서 죽는 날까지 최 장기간 제주를 지켰던 이경록 제주목사, 그분이 처음 목성이었던 것을 헐고 더 단단한 석성으로 쌓았고 왜구에 맞서 제주를 지켜낸 위대한 분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성은 길이가 1360미터 높이가 4.5 미터 되는 옹성이 있는 타원형의 아름다운 모습인데 성위에 오를 수 있도록 계단이 되어 있다. 우리는 성에 올라 걸어도 보고 차도 마시고 그림 같은 비양도를 바라보면서 잠시 머물렀다.
성을 내려와서 차도를 건너 들판으로 접어들면 양배추,콜라비,적채 등 밭에 있는 작물이 다 꽃이다. 꽃밭 같은 들판을 한참 지나다 보니 이곳이 군위 오 씨 명월파의 집성촌이었다. 명월리가 먼저인지 명월파가 먼저인지 지명의 유래를 생각하며 걷는데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건천이 있고 계곡 같은 건천 변에는 팽나무 군락지인 마실길이 참 아름답다. 마치 바오바브나무 같은 팽나무는 여름에는 온갖 덩굴들이 타고 올라 토피어리가 되어버리지만 지금은 군식구 하나 없는 팽나무의 진면목만이 다 보인다. 푸른 잎 하나 달지 않고도 저렇게 이쁜 몸매의 나무는 유일하지 싶다. 섬세한 실가지를 조화롭게 키우고 나무의 끝부분은 전지라도 한 것처럼 더도 덜도 아닌 같은 길이로 가지를 키우는 모습이 참 특이하고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멋지다.
명월리를 조금 벗어나 다시 들판을 걸어 들어가면 축산농가가 모여 있는데 냄새가 고약하지만 따지고 보면 다 우리의 몸과 들이 아니다.
"自他不二, 自他一如"다.키우고,먹고 배설하고, 다시 거름이 되어 돌고 도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 냄새가 근본, 인본이다. 도인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니 후각이 무디어지고 괜찮더라.
명월리 축산농가를 다 지나고 동명리와의 경계 아래 쯤 밭담에 멋쟁이 하루방이 있어 사진을 찍고 가는데 위쪽에 보니 밭과 밭 사이에 작은 조각공원 같은 게 있어서 살펴봤더니 대한만국 석공예 명장 장공익 선생님의 작품이었다. 다 지나고 나니 그 분과 그 장소의 연관성을 찾지 않고 지나친 게 후회가 된다. 하필이면 잘 찾지도 못하는 외진 곳에 작품을 설치했는지, 연고가 있을 것 같은데 그분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이 그냥 지나치게 된 것 같다.
동명리에서 차도를 한참 지나고 어느 오름같은 길을 넘어서면 만뱅디묘역 길, "하늘 가는 길"이 나온다. 꽃을 보면서 즐겁게 걸었던 길 막바지에 슬픔의 길이 있어서 잠시 그 시대의 아픈 역사를 아는 데로 되뇌어 본다. 4.3 사건은 그 시대는 잘 모르지만 광주 민주화운동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 정도의 분노가 치미는 사건, 잊을 수도 잊어서도 안 되는 항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제주, 본토 사람보다 외지인이 더 많을 것 같은 도시가 되었지만 무덤 속에 계시는 저분들이야말로 제주의 주인이고 저분들의 희생이 오늘 나 같은 사람이 찾아들어 즐기는 곳으로 만들어주셨다는 생각에 머리를 숙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묵념을 드린다.
오늘도 이 길을 안내해주신 올레님께 감사드립니다.
한수풀 역사순례길 안내판
명월성지의 성
기생하는 덩굴식물이 자고 있는 지금이 가장 편해보이는 퐁낭
로즈메리 꽃
비양도가 보이는 들판에 있는 양배추도 적채도 다 꽃같이 이쁘다.
돌밭, 돌씨를 뿌린듯한 밭이다. 돌을 밀어내고 싹을 키우려면 잡초만큼 억센 농작물만이 살아남겠다.
담장 밑에 가꾼듯한 광대나물 꽃과 까만 돌담도 이쁘다.
명월리 퐁낭 군락지
한 나무에 두 가지 동백꽃이 피었다.
멋쟁이 하루방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장공익 선생의 작품
예수와 어린양들인데 작품 설명이 없어서........
자연적인 돌 그대로에 조각한 얼굴들
천태만상을 딛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같은데.......
천태만상
금오름을 바라보면서 간식 먹는 중
금오름에서 나는 페러글라이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