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라산
2017.1.17
하룻저녁에 열두 기와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는데 어젯밤 김포공항에서 지은 집은 사상누각이 아닌 `한라 상설각`이었다.
떠나기 전 주말에 제주에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속으로 날을 잘 받았군 생각했다. 밤 9시에 숙소 근처에서 먼저 우뚝한 어디서나 보이는 한라산을 바라보니 하얗게 보였다. 그것이 눈인지를 모르면서도 가슴은 두근거리고 밤은 너무 길었다. 숙소에 들어가 있는데 제주에 계시는 분 한테서 문자가 왔다."어제는 바람 때문에 입산통제가 되었습니다." 이 역시 내 맘대로 해석한다."분명 눈이 너무 많이 오고 바람이 심해서 통제를 했구나"그렇다면 내일이 적격이겠다고 생각하며. 한 번 더 날을 잘 받았다고 좋아한다. 그리고 기다렸던 새벽이 오고 여명 속에 길을 나섰는데 새벽빛에 보이는 한라산이 아직도 하얗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시청 앞에서 780번을 탔는데 이제는 달려가는 30분이 또 길다.
하얗다고 다 눈이 아니라는 걸 아는 순간 내 기대는 쿵하고 어젯밤에 지었던 기와집들이 일시에 모래 알갱이로 돌아간다. 하얗게 보이는 건 해뜨기 전의 원경이어서 희뿌옇게 보이는 실루엣이었다. 그러나 산의 정수리엔 눈이 있을 거라고 믿고 성판악에 내렸다. 1월 중순, 가장 추운 시기인데 당연히 길에는 눈이 한 자 이상은 쌓였을 거라 생각하고 스패치를 하고 아이젠은 가다가 하기로 하고 입구에 들어섰는데 "이게 웬일이야"눈이 없다. 통제까지 했던 그 바람이 눈을 어디로 다 실어날랐을까? 올라가면 있겠지 하면서 걸었지만 눈은 여전히 없고 나뭇가지는 비를 쪼르르 맞은 듯 말갛게 씻겨 있다. 대신 눈 속에 겨울잠을 자야 할 돌들이 다 험상궂은 얼굴들을 드러내고는 봄인 줄 알고 나왔으니 나무라지 말란다. 그러면서
내발에 심술을 부리면서 발길을 비틀거림으로 흩트려 놓는다. 나도 지지 않고 마구 밟아 주었더니 졌다고 생각되었던지 조금 오르니 얌전한 데크를 깔아 놓았다. 편하게 잠시 걸었더니 울퉁불퉁 못 생긴 길이 또다시 동굴동굴 한 자갈돌을 발 밑에 밀어 넣고 약을 올린다.
돌길과 약간의 얼어 있는 눈 길하고 싸우면서 힘들게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해서 보니 진달래는 빨간 입술을 품고 하얀 산호 같은 눈꽃을 피웠다.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고 서둘러 백록담 8부 능선까지 올랐는데 그 좋던 날씨가 흐려지고 바다에서 올라온 구름이 도착해서 이제는 구름이 미워진다. 그래도 바랍이 어제 눈을 싣고 무겁게 날았는지 오늘은 잠잠하고 춥지가 않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고 정성에 올랐다. 정상에는 나와 같은 기대감으로 온 사람들이 총천연색 구름같이 몰려 있다. 침묵이 흐른다. 속으로 모두들 실망하고 있으리라. 우리도 그 침묵 속에 끼어서 기다리는데 일시에 환호성이 터진다. 그건 의도하는 게 아니다. 감탄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거다. 서서히 백록담이 그 크고 벅찬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저기서 특종을 잡은 기자들의 카메라 셔터 같은 소리가 들린다. 찰캌찰칵, 너무 놀랐을까? 백록담은 다시 구름 뒤로 사라지고 잠시 막이 내려진 듯하던 한라산의 무대는 다시 열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아래쪽에는 바다가 드러날 듯 말 듯 구름이 벽을 만들고 있어서 바다조차 시원하게 볼 수 없어 너무 아쉽다.
고은 선생님의 시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보았던 그 꽃,
이 짧은 시가 함축하고 있는 많은 이야기가 내게 다 담겼다. 올라갈 때는 위태로운 발 밑만 보느라고, 그리고 정상이라는 욕심으로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 했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눈꽃이 이쁘게 피어 있는 나뭇가지가 많았고 풍경도 아름다웠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오직 정상만 고집하고 출세를 위해 서먼 살다 보면 인정을 쓰지 못해서 중요한 건 놓치고 만다. 올라갈 때도 주위를 돌아보며 꽃을 볼 줄 아는 삶을 살아야 된다.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는 장관인 백록담을 내려오는데 비록 기대했던 설경은 아니었지만 구름을 걷어주시면서 보여주었던 그 크고 넓은 백록담을 비좁은 내 가슴속에 다 넣고 보니 마음 그롯을 키워도 키워도 백록담으로 채운 가슴은 터질 듯하다. 연초에 신령스러운 백록담 기운으로 가득 채우고 시작하는 2017년은 설문대 할머니가 잘 보살펴주셔서 무사히 그리고 행복하게 지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산호 같은 눈꽃
이것이 대형 눈의 결정체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겨우살이를 키우고 있는 나무
백록담의 인파들
백록담
바다 쪽 풍경
사라오름
하산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