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의 설경(도봉산)
모두가 눈 보기를 포기하고 있던 2월 중순, 생각지도 못했던 눈이 모두에게 선물처럼 넉넉하고 푸짐하게 내렸다. 모처럼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선물 받을 자세가 안 된 거라고 하늘이 나무랄 것만 같은 날이어서 산 좋아하고 눈 좋아하는 세 사람이 새벽에 연락해서 "가자"하고 나섰더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선물이 온 산천을 순백의 세계로 이끌었다. 도봉산에서 이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설경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도봉역에 내려서 도봉산 입구에 들어서니 정상의 풍경이 벌써 하얗게 늘어서 있고 날씨도 영하로 낮은 기온이어서 하루 종일 녹아 없어질 것 같지 않아 급하지 않게 올라갔다, 어떤 때는 눈이 덮인 걸 보고 오르면 정상에 가기 전에 다 녹아버려서 한 번도 완벽한 설경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만장봉 일대를 가장 빠르게 오를 수 있는 코스인 천축사 방향으로 오르는데 그동안 눈 내려 쌓이거나 얼어붙은 빙판이 없으니 길이 미끄럽지도 않고 포실포실한 물기 없는 눈이어서 초입의 길은 흙이었는데 천축사 일주문에서부터 길에는 밟아도 때 묻지 않는 눈이 하얀 길을 만들어 주었다. 천축사에서부터 감탄과 환호성을 연발하면서 오르는데 가을바람에 다 쪼글어들었던 단풍나무는 모처럼 눈을 이고 습기를 머금어서 지난가을의 붉었던 추억을 되살리는지 오므렸던 잎들을 펼치고 붉은색을 되찾아서 마치 제철 인양 이쁘게 소복하고 소담스러운 자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렇듯 전체가 순백색인 가운데 붉은 기를 띤 단풍 밭도 좋고 실가지에 듬뿍 올려놓은 눈이 얼어붙어 바람에도 날리지 않는 상고대도 좋았고 더 높이 오르면 솔잎 낱낱이 오랫동안 눈과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주 꼭 붙들어 메듯이 함께 얼어 있다. 온 산천의 식구들이 다 행복해 보이는 행복 밭에 우리가 불청객처럼 찾아들었는데도 불편한 기색 없이 행복을 나누어 주는 도봉의 넉넉함에 비틀거리도록 취해버린 하루였다.
마음속까지 오직 하얀 바탕이 되어버린 마음으로 만장봉 일대에 오르니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이 일어서 적절한 언어가 결여된 듯이 말문은 닫히고 숨 막히게 아름다웠고 시선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거대한 암봉 사이사이로 피어 있는 마뭇가지의 하얀 포인트는 한국화의 극치였고 주변을 받쳐주는 산세는 그들의 들러리처럼 모두가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숨죽여 멋진 봉우리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다행히 날씨까지 포근하고 맑아서 오랫동안 그 아름다운 절윤 속에 함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멋진 설경을 눈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한테 다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힘들게 찾아가지 않으면 볼 수 없으니 그것이 안타가워서 사진으로라도 많이 담아서 보여주고 싶었다.
만장봉 일대를 마음껏 감상하고 우이암 쪽으로 돌아서 하산하려고 가는데 우이암 찾아가는 길에도 계단이며 외줄기 길들이 얼마나 좋은지, 오래도록 원하고 기다리면 환영이 나타나듯이 마치 그런 환영 속을 헤매는 듯했고 우이암에 이르니 거기도 하얀 설산에 우뚝한 거봉이 너무 훌륭했다. 그뿐 아니라 하산길로 접어들어 돌아가면서 보이는 멀리 오봉까지 두각을 드러내면서 도봉산의 멋진 암봉이 서로가 잘났다고 뽐내는 미봉 대회에서 우리는 공평하게 다 잘났다고 높은 점수를 주고 박수를 치면서 길을 걸었다. 그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내려오니 늘 보던 메마른 겨울나무들이어서 마치 꿈속에서 깨어난 듯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현실 속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사진들을 담아 와서 다시 보니 깊은 산중에 보석을 묻어두고 온 듯하다. 가끔은 이런 행복한 시간이 있어야 삶이 윤택해지는 윤활유가 된다.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