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공룡능선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코스:오색-대청-중청- 소청-희운각-공룔능선-오세암 백담사.
공룡능선은 설악산의 제1경이며 가을이 오면 가장 먼저 그곳에서 단풍을 마중가고 싶은 곳이다.대청봉 정수리에 쏟아부어 놓은 암석조각들이 마치 태양열의 집열판처럼 빛을 받아모아 산 전체에 골고루 빛을 뿌리고 한밤중에 내린 찬서리가 밤낮의 괴리감에 몸부림 치다가 어쩌지 못한 초목들은 잎새마다 제몸에 붉은 반점의 상처로 떨었다.작은 반점에서 흘러내린 피가 지혈이 되지 않아 아래로 아래로 만산홍엽으로 수를 놓고 그 피는 백두대간을 흘러 동맥으로 정맥으로 쏟아져 나와 결국에는 한라산에서 지혈이 되리라.
밤 11시에 야반도주 하듯이 달아난 버스가 새벽 3시경에 오색리에 도착했다.한밤중 적막강산에 내린 일행들은 모두가 발등을 밝힐 작은 불빛 하나로 도깨비가 된다.깜깜한 밤길을 열을 지어 올라가는 도깨비불이 아랫 쪽에서 보면 유성의 흐름같기도 하다.발밑만 보면서 오르다가 하늘 한 번 쳐다보면 나뭇가지에 걸린 별들이 유난히 밝고 커서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같기도 하고 열나흘 만월은 "이밤중에 무슨짓이냐"며 나무라듯 하면서도 인자한 성품으로 가만히 빛을 내려 주셨다.
오색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낮에도 힘드는 길이지만 나처럼 느린 사람은 무사히 대청봉 9부능선까지 올랐을 때 서서히 차오르는 여명에 어둠은 밀려나고 어느새 동쪽이 확연히 들어났다.좀더 속도를 높여야 일출을 볼 수 있는데 10분만이라도,그러나 그 10분 단축이 너무나 힘이 들었다.그렇게 염원하던 대청봉 일출을 정수리가 아닌 목덜미 쯤에서 보는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난 분명히 대청봉 일출을 본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하늘에 티끌 하나 없었으니 그 광명이 오즉했으랴! 위대한 태양이 떠오르자 바다엔 구름층이 금빛 선을두르고 바다 건너에 산들은 운무와 함께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 갔다.그 일대 장관을 보려고,그 감동에 빠져보려고 난 숨고를 틈도 없이 올랐던가?
해가 구름층을 완전히 벗어나자 설악산은 일제히 깨어나고 온산은 이미 가을의 중심에서 조명이 들어오자 막이 오르고 어떤 장면이 연출 된 것처럼 다 준비되어 있었다. 대청봉에서 사방을 조망하고 중청으로 갔는데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공룡능선이 한 눈에 바라다 보였다.3년 전 여름에 보던 모습과는 천연지차였다.다른 각도에서 보는 차이와 다른 계절에 보는 차이로 공룡능선은 어떤 대가의 명화처럼 아름답게 전시돼 있고 그 속으로 들어가면 나 또한 저 명화의 한 폭에서 작은 소제가 되리라 생각되었다.가는곳마다 압도적인 암봉이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지 더구나 단풍과 어우러져 있으니 그 명품은 천국이었고 천국은 내 머리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발 아래도 있다고 한 소로우의 말이 생각났다. 모든 건 일체유심조여서 천국이라고 꼭 하늘에 있으란 법은 아닌란 생각이 들었다.
공룡능선을 보는 순간은 명화에 매료되어 힘든줄도 모른 채 올랐는데 생각해보면 힘들면 그만큼이 아니라
배가 되어 돌아오는 멋진 장면을 보게되니 손해보는 건 오히려 산이었다.저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려고 밤마다 얼마나 상처가 아팠을까만 무료로 마음 껏 내어 주고도 인간처럼 손익을 따지지 않으니 우리는 감히 힘든다는 표현을 하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아! 그러나 마등령 가는길은 사력을 다했다. 힘든 고개는 여기가 끝이라고 하고도 속고속아 다섯개는 더 넘어서 마등령에 다달은 것 같았다.1275봉을 넘을 땐 사력도 남지 않았다.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그만큼 오르고 그만큼 내렸으니 참으로 내자신이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았고 그러고도 아직 글을 쓰고 있으니 나에게 한계는 금방 닥칠 것 같지는 않아 언제나 산에서 나 자신을 시험하곤 한다.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오세암 지나 백담사까지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까지 보태져서 어느 때보다도 길었다.예정보다 1시간 더 걸려서 약 13시간을 쉴 뜸도 없이 걸었다.아침에 일어나지 못 할 것 같았는데 살만한 걸 보면 아직 마침표 찍기는 싫다.
가을은 즐기지 못하는 사람에겐 참 쓸쓸한 계절이다.그래서 그 쓸쓸함을 느낄 겨를을 주지 않으려고 단풍은 그렇게 곱게 붉었나 보다.단풍 속에서 단풍같은 내가 한 때의 꽃이 되어본다.